Pak Yon (1595-1657)
제 이름은 ‘얀 얀슨 벨테브레이(Jan Janszn. Weltevree)’ 입니다. 한국에서는 ‘박연(Pak Yon, 벨테브레이의 한국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1595년도에 ‘드 레이프(De Rijp)’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출생연도는 앞뒤로 1년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얀(Jan)’께서 출생 문서를 잃어버리시는 바람에 이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삶을 훑어보는 데에 있어 출생연도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에 제 생년을 1595년으로 소개합니다.
제 동상은 ‘드 레이프(De Rijp)’의 대교회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그토록 중요한 장소에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모시고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저의 삶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여러분을 아름다운 마을 ‘드 레이프(De Rijp)’로 모시겠습니다. 마을을 묘사한 글과 사진을 통해서 왜 이 마을이 그토록 특별하고 더 알아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혼자 모든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저보다 이 마을을 더 잘 아는 이들에게 본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 한 편으로는 여러분이 드 레이프라는 마을에 흥미를 가지게 되시길 바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저에게 최고의 기억들만을 안겨주었던 한국의 문화와 생활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여행기를 즐겁게 읽고 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인생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 드 레이프(De Rijp) 마을을 걷다가, 처음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깃발을 걸고 아시아로 갔던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선원들은 온갖 종류의 향신료를 가져왔습니다. 청어 잡이에서 돌아와 자신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부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건축가이자 풍차 제작자로 널리 알려진 얀 아드리안스존(Jan Adriaanszn)도 있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꼭 20살이 더 많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유럽 각지에 간척지를 만든 업적을 기려 레흐바터(Leeghwater)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후 나는 얀 아드리안스존(Jan Adriaanszn)의 아버지가 새로 지은 목재 수문 가에 앉아 먼 곳으로 떠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1626년에 “홀란디아(Hollandia)”호의 선원이 되어 그 해 3월 17일에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Indië로 부름)로 떠났습니다. 나는 1627년에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를 타고 자카르타에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당시에는 Decima)로 갔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강한 역풍을 만나 여정이 예정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그 결과 식수가 다 떨어졌습니다. 선장의 판단 하에 우리는 여정을 중단했고 식수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몇 톤의 물을 얻기 위해 두 동료와 함께 상륙했습니다. 두 동료 중 한 명은 나와 같은 드 레이프 출신 더크 히아베르츠(Dirck Gijsbertsz)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암스테르담 출신 얀 피에테르츠(Jan Pieterse Verbaest)였습니다. 그 섬은 한국 남단에 있는 제주도였습니다. 제주도는 한국 본토에서 20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분주히 물통을 채우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포박했습니다. 우베르케르크 선원들은 이를 보고 돛을 올리고 급히 떠나갔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은 중종(1506-1544) 때부터 일본의 침입 등에 대응하여 강력한 고립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엄격한 규칙 하에 무역은 여전히 이뤄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뜻하지 않게 한국에 오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한국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 역시 이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서울로 보내졌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만, 곧 더 많은 자유를 얻었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나는 최초로 한국에 온 서양인이었습니다. 나는 무기와 화약 등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여생을 궁정의 고문으로서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나는 다정한 한국 여인과 결혼해 자녀들을 두고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도 얻었습니다. 이로써 나는 진정한 한국인이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행히도 나의 두 친구들은 만주족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1653년에 “스페르베르(De Sperwer)”호가 제주 해안에서 난파당했습니다. 그 일부 선원들은 13년 후에 한국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페르웨르호에서 서기로 일한 호리쿰 출신 헨드릭 하멜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하멜은 제주도를 “퀠펠트”라고 부름). 그는 일지에 선원들이 어떻게 통역관이었던 나와 함께 서울로 보내졌는지 서술하였고 그 덕분에 나는 네덜란드에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